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문단 편집) === [[러일전쟁]] 이후 === 일본이 발도 돌격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것은 러일전쟁을 겪은 이후였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것이지만, 일본군은 보급 및 근본적 국력 문제로 거의 패전의 위기에 몰렸었다. 육상전에서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포츠머스 조약|외교전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승전할 수 있었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일본은 승전하고서도 러시아에게 배상금을 한푼도 받을 수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러일전쟁]] 문서로. 일본군은 종래의 반란군 등처럼 한 수 아래인 상대와 달리 청나라와 러시아 같은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하면서 독일식 화력주의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많은 포탄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맞상대한 러시아 제국군이나 일본이 군사교리를 차용했던 독일같은 서양 열강들은 공업 능력이 뛰어났으므로 포탄을 많이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산업화 후발 주자였던 일본의 공업 능력으로는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포탄 부족 문제는 강력한 요새를 장기간에 걸쳐 공략한 [[뤼순 공방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오사카 포병 공창의 하루 포탄 생산량이 900발이었다고 하며, 한번 제대로 공성을 하기 위해선 한 달 치 포탄을 모아야만 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이때부터 탄약 소모에 대한 병적인 우려가 무기체계의 개발과 배치까지 이어지는데, 스트로블랑식 박격포가 지지부진하게 도입된 이유도 바로 빠른 발사속도를 가진 박격포의 탄약소모량이 부담된다는 이유였다. 일본군은 스트로블랑식 박격포는 커녕 대대급 야포를 축소시킨 형태의 보병포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여기에 당시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던 3군 자체의 실수까지 겹쳐, 만들어진 새 포탄이 도착하는 대로 공격을 감행한 결과, 매달 같은 날에 공격이 진행되었다. 다만 뤼순항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부동항으로 요새로 구축된 곳이였다. 또한 독일에게 있어서 그때까지의 가장 큰 적이 프랑스로 도로망 구축이 잘 되었고, 비교적 인접한 곳이였으나,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 곳은 드넓은 벌판에 도로망이 구축되지 못한 곳이였다. 총력전에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것을 깨달았던 일본군은 후술할 수 많은 교본들의 평가들 처럼 나름의 타개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타개책은 서구식 군사 제도로는 미래 전장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 했고, 1차대전 승전국인 프랑스의 엘랑비탈적 교리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을 상대로한 백병전 강요에서 큰 성과를 거두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착각과 확증편향에 빠지게 되어 결국 웃음거리로 자멸하고 만다. 일본군은 1차대전 이후 열강인 프랑스에서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같은 교리, 사상들에 착안하여 나름대로의 교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__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원인이 정신력이라고 결론__ 내리고 본격적으로 [[무사도]] 정신[* 정통 무사도와 다르다. [[하가쿠레#s-1|하가쿠레]] 문서 참고]과 군인 정신을 강조하며 이것이 하나의 교리가 된다. 이에 따라 탄생한 일본군 보병 교범인 보병조전(步兵操典, 190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최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무형전력 즉 군인정신의 중요성이 입증되어 이로 적을 이기는 것을 증명되었다. 보병은 전투의 중심이며, 승리를 위해선 공격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이것의 결정체가 총검 돌격이다. '''사격만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최후에는 역시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사격은 백병전을 위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며''' 특히 백병전은 일본 전통의 묘기(妙技)이다. [[전열보병]] 시대의 근대적 전술사상에, 그나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에도 사격전만으로 얼마든지 회전에서 승리를 가져갔다. 그 유명한 [[레드 코트]]와 [[씬 레드 라인]]이 그 증거. 그럼에도 백병전이 자주 발생했던 것은 주무기인 머스켓이 아직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연사력이 좋지 않아 돌격해오거나 도망가는 적을 사격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사격전에서 이기고 있는 쪽은 적이 도주 후 후방에서 재집결, 다시 회전에 나서는 것을 막고 확실하게 끝장내려면 화력전의 마무리로 백병전을, 사격전에서 밀리는 쪽은 적의 우월한 화력투사를 막고 쪽수로 밀어붙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백병전을 선택했다. 그러나 전자의 백병전은 전과 확대를 위한 옵션일 뿐이고, 후자도 궁여지책으로 하는 것이지 더 좋은 방법이라서 쓰는 것도 아닌데다가 머스켓의 연사력 문제로 돌격 중 죽어나가는 숫자가 그나마 견딜만 했던 당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근데 일본은 이걸 완전히 잘못 이해하여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받아들였으며, 그마저도 1차대전부터는 [[맥심 기관총|총기 성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엄폐도 산개도 없는 돌격전술은 [[참호전|그냥 자살]]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도 모자라서 백병전=정신력이라는 정신나간 논리를 전개해 버린다. 그리고 1차대전 이후 과학의 진보와 변혁이 전략 전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고 보면서도 '제국의 장차 작전을 예상해보면 최근의 유럽 전역에서와 동일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실례에 나타난 무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제국 고유의 공격 정신에 결함을 발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이는 1920년 당시 참모부 정보부장이었던 타나카 쿠니시케(田中国重)의 평가이다. 또한, 연합군 지상군의 주력이었던 프랑스군의 군사 교리들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그것들을 자국군에 집어넣으려 했다. 애초에 일본 육군이 독일식 전략 전술을 도입한 이유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졌다는 프랑스를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꺾었으므로 육군 최강은 독일'이라는 논리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쨌든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므로 이들의 전략 전술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어느정도 구색이 맞기도 했다. 물론 그 속내는 어떻게든 포탄을 덜 소모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이렇게 모델로 삼고자 한 프랑스군도 가능한 만큼은 화력을 중시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